지금의 옥탑방으로 작업실을 옮겨올 때의 이야기 입니다.
지난 겨울 이 맘 때, 저는 이전에 있던 작업실 동료와 사이가 영 틀어진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당분간 있어도 좋다는 동료의 말도 있었고, 작업실을 새로 알아볼 엄두를 낼 수 없을 정도로 정신없이 바쁜 상황이어서 저는 불편한 맘으로 옛 작업실에서 몇 개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동료로 부터 퇴실 통보를 받게 되었는데, 저는 보증금을 내지 않은 멤버였던 탓에 딱히 저항할 입장은 아니어서 급하게 작업실을 빼야만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6월 중순은 이사철 성수기인 5월이 막 지난 달인데다가, 이상기온현상으로 갑자기 날씨가 더워져 이사가려는 사람도 이사오려는 사람도 적어 부동산 매물은 가뭄이었습니다.
인터넷 까페에서 보고 괜찮은 매물이다 생각이 들어 연락해보면 누군가 바로 채어가버린 상태이거나, 괜찮은 매물이다 싶으면 가격이 부담스러웠습니다.
매물을 보고 가격이 부담스러워 조금 망설이다가 큰 맘 먹고 결정을 내리면 망설인 사이 누군가 계약을 낚아 채어가는 경험을 여러 번 반복했습니다.
또 어떤 공인중개사는 급하게 계약을 맺어 바가지 씌울 궁리를 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6월 대낮의 뙤약볕은 너무 따가웠습니다.
약속한 이사 날짜는 점점 다가오고 마음은 점점 초조해져만 갔습니다.
당장 처분할 수도 없는, 반년 새 늘어난 살림살이가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러다 큰누님께서 지나는 말로 '집 앞에도 뭐 있지 않더냐'고 말하였고 저는 그 길로 집에서 가까운 부동산에 들어갔습니다.
사정을 이야기하고 매물을 검색했더니 원하는 조건보다는 약간 값을 더 주어야하는 옥탑방이 있었습니다.
아저씨가 옥탑방에 연락을 하셨고 저와 아저씨는 옥탑방으로 향했습니다.
가는 길에 이래저래 이야기 나누다보니 아저씨가 지금 보다 젊었을 때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아저씨는 IMF 당시 사업을 실패하여 그 스트레스로 갑자기 시력이 저하되고 거동이 불편해졌다고 합니다.
마음을 다스리고 다스려 겨우 앞이 보일 정도의 시력을 되찾으셨고, 할 일이 없을까 찾던 중 공인중개사 시험을 보기로 마음 먹었다 합니다.
앞도 잘 안보이고 거동이 불편하여 어디 학원 같은 데 나가서 배울 상황은 아니었고 거의 책으로 독학하셨다 하는데,
한 번에 당당히 공인중개사 시험 합격하셨다 합니다.
옥탑방에 도착하니 나이 지긋하지만 정정하신 주인 어르신이 방을 보여주었습니다. 방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부동산 아저씨와 저는 가격을 살짝 깎아볼 요량으로 가는 길에 밀약을 맺었는데, '가격을 잘못 알고 방을 봤는데 방이 괜찮아서 계약하려하니 그냥 깎아달라' 할 참이었습니다.
재차 (잘못 알고온) 가격을 묻고 물어 확인하고 어르신을 모시고 부동산으로 왔습니다.
하지만 어르신은 '무슨 소리냐, 그런 가격은 받아본 역사가 없다'며 조금 아까 확인했던 가격을 부정하셨습니다.
부동산 아저씨는 계약을 성사시켜보려 노력했지만, 저 역시도 부담스러운 가격에 계약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알프스를 잘못 오른 나폴레옹의 심정으로 '얘들아 이 옥탑이 아닌가 보다.' 속으로 외치며 어깨가 추욱 쳐졌습니다.
그 때 부동산 아저씨는 약간 곤란한 말투로 "다른 옥탑방이 있긴 한데, 한 번 보실라우?" 하셨습니다.
눈이 번뜩! 저는 당장 보러가자며 아저씨와 길을 나섰습니다.
드디어 도착, 아저씨가 텅텅텅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계세요?"
묵묵부답. 분명히 전화 한 통 넣고 왔는데, 이상하게도 그 집에서는 아무런 응답도 없었습니다.
텅텅텅- 계세요? 하기를 몇 번, 아저씨가 갑자기 놀라며
"어? 번지수가! 이 집이 아니잖아?"
하셨습니다.
오 마이 갓~
아저씨가 눈이 좋지 않아 비슷한 번지수를 잘못 보고 착각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번에 아무도 안 나왔구나."
세상에 이 무슨 기적인지!
전에도 여러 번 헛탕을 친 것으로 보이는 이 아저씨의 눈이 그 날 따라 번뜩 뜨였나 봅니다.
우리가 가야 할 집은 헛탕 친 집의 바로 뒷 집이었고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주인 아주머니께서 나오셨습니다.
(배경 음악 : Libera Boys Choir의 'Sanctus' 혹은 'TV는 사랑을 싣고')
이 옥탑방은 올라가는 ※계단이 매우 가파른 데다가 낡고 조금은 보기 흉한 부분도 있었지만
(※ 이 계단은 'Stairway to Heaven'이라 별명을 붙였는데, 일단 오르면 저에겐 천국 같은 곳이기에 그리 부르기도 하지만
겨울에 계단에 빙판이 얼어 미끄러지거나, 술에 취해 계단을 헛 딛는 경우엔 정말 까딱하면 '천국 가는' 수가 있어서 그렇기도 합니다.)
시일이 임박하여 딱히 다른 선택이 없었을 뿐더러, 이 옥탑방은 묘하게 마음을 끄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오래 동안 옥탑방에 사람을 들이지 않고 집주인 내외가 창고처럼 사용하고 계셨는데,
사람을 들이지 않으니 관리가 어려워 지난 겨울 보일러가 터져버렸다 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들여야겠다 싶어 지인을 통해 그 부동산에 매물을 등록했다고 합니다.
작업실 동료와 사이가 틀어지지 않았더라면,
큰누님이 집 앞 부동산에 가보라는 말을 안했더라면,
먼저 가보았던 옥탑방에 찜찜한 맘을 안고서라도 그냥 계약했더라면,
아저씨가 그 날도 눈이 안 보였더라면,
또 집주인께서 그 부동산에 매물을 등록하지 않았더라면
저는 이 '아몬드 다람쥐의 반짝반짝 불이 들어오는 옥탑방'에 들어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
'인생지사 새옹지마'라더니 - 사람의 인생은 한 치 앞도 몰라 재미가 있습니다. ㅋ
이사 후 저는 청소하고, 퇴근 후 틈 나는 대로 페인트 칠하고, 냄새나는 하수구를 막는 등 개척 정신을 발휘하여 뚝딱뚝딱 보수해 나갔습니다. 그 결과 이 옥탑방은 계속 머물고 싶은, 마음에 드는 저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
- 작업실 식량 채워넣겠다고 장 본 것을 들고 낑낑대며 빙판 언 골목을 들어서던 2013년 1월 어느 겨울날 적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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