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의 장갑

🎼 “피아니스트라서 (손 보호를 위해) 장갑을 끼고 다니시나요?” 코로나19 상황이 시작된 후 흰 면장갑을 끼고 다니는데, 아주 가끔 그런 질문을 받는다. 피아노 좀 친다며 깔끔 떨고 예민하게 구는 이미지는 스스로 별로라서 “방역 장갑이에요.”라고 답한다. 실제로 방역 장갑이 맞기도 하고.

흰장갑은 차림새에 따라 묘한 마법을 부린다. 흰장갑을 착용하는 직업들 때문이다. 잘 차려입은 날은 무슨 일을 해도 소믈리에같은 전문가처럼 보인다. 때론 매장이나 주차장에서 안내하는 사람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다. 방한모에 패딩 차림으로 전통시장을 찾는다면 누가 와서 나에게 가격을 물어도 전혀 위화감이 없다.

그냥 손을 자주 씻으면 되지 굳이 장갑까지 낄 필요가 있는가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비유가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코와 입을 자주 헹구면 되지 굳이 마스크를 쓸 필요가 있는가 묻는다면? 집을 나설 때 새하얗던 장갑이 돌아올 무렵 새카메지는 걸 본다면 맘이 달라질 수도 있다.

한번 껴 보면 장갑이 주는 편리함과 심리적 안정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장갑을 끼지 않았다면 아마 어딘가 들어갈 때마다 소매를 잡아 당겨 소매로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텐데 그 모습이 더 과상해 보이지 않을까? 함께 다니는 파트너를 위해 장갑 낀 내가 문을 대신 열어 주는 덕분에 매너남이 되는 건 덤이다. (물론 손은 하루에도 수십 회를 권장 6단계에 맞춰 씻는다. 부득이한 외출시엔 알코올 스프레이도 지참한다.)

화장실에서의 사용이 궁금할 수도 있는데, 그건 댓글이 달리면 그때 밝혀 보겠다. (그렇다, 이건 댓글을 유도하는 밀당이다.)

몇 년 전만 해도 평소에 흰 장갑을 끼고 다닌다면 유별난 사람으로 비춰질 가능성이 농후한데,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요새는 남들의 시선도 없거니와 대체로 별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라 좋다. 그동안 위생에 민감한 사람들이 불편러처럼 취급되었는데, 이 기회에 그런 사람들이 보다 존중 받았으면 좋겠다.

그동안 무시되었던 다양성은 점차 목소리를 내고 있고 세상엔 세심하게 대해야 할 대상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그걸 어떻게 다 일일이 맞추느냐 생각이 들 수 있지만 상대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와 존중, 약간의 세심함만 더하면 괜찮은 시작 아닐까 본다.

늘 친절하자 - 세상이 나에게 그렇지 않더라도.
아무튼 사용한 장갑 50켤레가 쌓여 빨래를 시작한다.

덧붙임.
바이러스는 섬유에서 버티는 시간이 비교적 짧다고 알려져 있다. 인체를 벗어난 바이러스는 비말의 돔형 박막을 보호막 삼아 생존하는데 섬유의 구조가 그러한 생존을 방해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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